여대생이 살고 있는 2층의 창문에 마무리 페인트 칠을 해야 하는데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를 들으니 다행히 장마비는 아니다. 하루쯤 지나면 그친다고 했다. 비가 물러가면 아마도 해가 눈부실 것이다. 하늘을 뿌옇게 덮고 있던 미세먼지가 빗물에 다 떨어졌을테니까 말이다.
조 감독은 주방에 설치된 커피 머신을 바라보았다. 이 기계는 블루커피 체인 본사에서 산 것이다. 500만원 짜리인데 1년 할부로 구입했다. 사실은 가게 임대 계약을 한 후 채 한달도 안돼서 기계 구입을 계약했다. 여러 군데를 알아보고 조건이 가장 좋은 곳을 선택한 것이다. 기계를 구입하면 커피점 운영에 필요한 모든 재료와 기술을 제공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체인점 사장으로부터 여러차례 전화를 받았다.
“감독님, 커피 기계 언제 가져가실 건가요? 가계는 아직 오픈 안하셨나요?”라고 말이다.
그 때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가게 인테리어를 마치면 가져갈게요.” 하고 미뤘다.
가게 내부의 인테리어를 거의 마치는 데는 6개월 이상이 걸렸을 것이다. 혼자서 궁리하고 디자인하고, 재료 사와서 조립하고, 설치하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구입계약을 한지 7개월만에 온 것이다.
조 감독은 체인점 본사에서 사온 로스팅한 원두 자루를 꺼내 한컵을 담아 분쇄기 깔대기에 넣었다. 블루커피 체인 본사에서 가져온 매뉴얼을 보고 시험을 하는 중이다. 원두는 상급에 가까운 중상급을 골랐다. 동네 가게들은 보통 중하급 원두를 사용한다는데, 조 감독은 원두 선택도 꽤 신경썼다. 싸구려 원두를 쓰면 가격 경쟁력은 있지만, 맛 경쟁에서 언젠가 도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고객에게 싼 커피를 제공할 수 없다고 다짐했다. 좀 비싸게 팔더라도 품질은 좋은 것을 사용하겠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원두가 부드럽게 분쇄됐다.
분쇄된 원두를 살펴본 조감독은 압축 용기에 가루를 담았다. 그리고 저울에 올려놨다. 원두 가루의 무게를 재는 것이다. 23.0g이 표시됐다. 작은 스푼으로 약간을 덜어냈다. 다시 저울에 올렸다. 19.5g이 나왔다. 스푼으로 가루를 아주 조금 뜨서 넣었다. 20.2g이다. 아주 미세한 양을 덜어내고 다시 쟀다. 20.0g으로 나타났다. 조 감독이 원하던 양이다. 구부렸던 어깨를 폈다.
‘스마일 우체국에서는 1샷의 원두 가루 무게는 20.0g이야. 이 기준으로 한잔을 뽑을 거야. 0.01g의 오차도 허용할 생각이 없어. 우리 고객에게 서비스하는 아메리카노 맛은 항상 똑같아야 하거든. 사람들은 커피 머신과 온도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나는 반드시 똑 같게 할 거야. 노력해서 안되는 일이 어디 있어?’
앞서 조 감독은 한달에 3~4번 블루커피 체인점에 가서 커피 추출 기술을 전수받았다. 사장이 직접 시범을 보여줄 때, 아주 조심스럽게 커피의 무게를 재던 모습이 조 감독의 뇌리에 너무 생생하게 각인됐다. 체인점 사장의 아주 조심스럽고도 경건했던 모습은 조 감독에게 충격이었다. 특히 1샷에 들어갈 양을 측정하던 모습은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감독님, 우리는 1샷에 0.1g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커피를 분쇄한 후 추출 단계에서는 1샷의 양이 가장 기본입니다. 이것을 대충대충 하다보면 커피 맛이 첫잔 다르고 두 번째 잔 다르고 천차만별이 됩니다. 일정한 맛을 유지하려면 1샷의 양을 똑 같이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블루체인 사장이 했던 말이다.
조 감독은 예전에 지인들과 커피점에 가면 아메리카노를 별 생각없이 마셨는데, 전문가들은 이렇게 정성을 들여 제조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블루체인 사장이 0.1g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면 나는 0.01g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거야!’
조 감독은 그때 이런 각오를 다졌다. 얼렁뚱땅 양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0.01그램도 오차 없이 양을 정확히 재는 것을 철칙으로 삼기로 했던 것이다.
조 감독을 커피를 내리는 시간을 조정했다. 30초를 넘기지 않아야 한다. 블루커피 사장은 25초에서 29초 사이에 내리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커피 내리는 시간이 30초를 넘기면 쓴맛이 강하고, 25초 이내에 내리면 싱거운 맛이 난다고 했다. 체인점에서 가져온 매뉴얼에는 25초에서 29초 사이가 적당하다고 적혀 있었다.
추출수의 온도는 93도를 맞췄다. 매뉴얼에는 90도에서 96도로 적혀 있었다. 조 감독은 그동안 커피 관련 서적을 여러권 사서 보고, 인터넷에서 커피 정보도 수집해 왔다. 커피 속의 카페인, 아세트산, 커피오일 등 다양한 성분이 물의 온도에 따라 추출양이 달라진다고 했다. 9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는 커피의 바디감과 밸런스를 잡아주는 성분이 적당하게 추출되는 반면, 30도 이하의 낮은 온도에서는 오일 성분 등이 추출되지 않아 바디감이 얕은 신맛이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100도 이상의 고온으로 추출하면 새로운 성분이 추출되어 커피맛이 이상해진다고 했다.
조 감독은 추출수 온도를 93도에 맞춰놓고서 최적의 추출 시간을 찾아내기로 했다. 25초. 26초, 27초, 28초, 29초, 30초 등 시간 별로 커피를 내려서 맛을 보기로 한 것이다. 물의 양은 120ml로 통일했다. 25초에 내린 커피는 싱기웠고, 30초에 내린 커피는 쓴맛이 확연했다. 25초와 30초는 역시 안맞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시간대를 26초, 27초, 28초, 29초에 맞춰서 테스트를 했다. 각각의 추출액에다가 물의 양을 조절해 보았다. 180ml, 240ml, 300ml, 360ml 등 물의 양에 따라 커피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 검증했다. 180ml 이상에는 2샷을 넣어야 커피맛이 났다. 이제 2샷을 기준으로 200ml, 220ml, 250ml의 물양을 조절했다.
커피점에서 좋은 재료로 좋은 맛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경쟁력이라고 조 감독은 믿었다. 바리스타 자격증은 없어도 한두달 후면 바리스타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스마일 우체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스마일 커피’를 내놓겠다는 꿈을 실현할 수 있겠다 싶었다.
커피 추출작업에 몰입한 나머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점심 때도 지나고 늦은 오후가 됐다. 자신만의 커피 추출법을 완성하기 위해 커피 머신 앞에서 원두를 분쇄하고, 무게를 재고, 온도를 맞추고, 컵의 물 양을 조절했다. 2kg 짜리 원두 봉지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졌다. 비싼 원두가 테스트 용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누군가 인사를 하는 소리가 났다.
조 감독은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다 말고 고개를 들어 문쪽을 바라봤다.
파마 머리에 금색을 입힌 아주머니가 문을 약간 열고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도자기 공방 아주머니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무엇 하는 곳이에요?”
“아, 아직 공사 중입니다.”
“옆에 세탁소에 왔다가 궁금해서 들렀어요. 안이 예쁘네요!”
“아~하하, 감사합니다.” 그제서야 조 감독은 커피 추출에 몰입했던 정신을 내려놓고 여유를 되찾는 모습을 보였다. 원두 가루가 담긴 용기를 추출기 옆에 조심스럽게 놓고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들어 오셔서 보셔도 됩니다.”
그동안 여러 사람이 궁금해서 왔다고 했지만, 조 감독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환영한 사람은 이 아줌마가 처음이었다. 실내가 예쁘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조 감독이 혼자 디자인하고 페인트 칠하고 장식을 꾸몄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가게 안으로 들어선 후 이곳, 저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조 감독은 그 옆에 서서 어떤 말을 할지 기다렸다.
“사장님, 실내 그림이 너무 좋습니다. 이런 가게는 생전 처음 봅니다.”
“에~. 전부 제가 다 했습니다.”
“정말로요? 사장님 혹시 화가세요?”
“아뇨, 아마추어 작가입니다.”
“무슨 작가세요?”
“그냥 습작하는.....”
작가라고 말하긴 했는데, 딱히 무엇을 하는 작가라고 말하기가 애매했다. 영화 촬영감독을 한 경험을 살려서 그동안 시나리오를 몇편 써둔 것이 있다. 아직 영화를 찍지 않아서 시나리오 작가라고 하긴 그랬다. 그리고 또 하나, 상상의 동물을 그려서 상표등록도 마쳤다. 이 동물로 열쇠고리를 만들고, 봉제 인형도 만들어 놨다. 시중에 내놓지 않아 정식으로 판매를 해본 적은 없다. 그래서 캐릭터 디자인 작가라고 말하기도 어색했다.
“우리집 커피 한잔 드실래요?” 조 감독은 화제를 돌렸다.
아주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여기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아주머니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다. 커피를 마시러 온 것이 아니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SNS에 올려서 많이 전파해주시면 더 감사합니다. 하하~.”
조 감독의 말에 아주머니는 스마트폰을 들고 앞면, 측면, 뒷면을 차례대로 찍었다. 사진을 다 찍고나자 아주머니가 다시 입을 뗐다.
“잠시 앉아도 될까요?”
“네, 앉으시죠. SNS에 올려주시면 커피를 무료로 드립니다.”
“정말요? 그럼, 제가 SNS에다 쏠게요.”
벽면을 따라 길게 뻗은 붙박이 의자에 앉은 아주머니는 스마트폰으로 방금 찍은 사진을 어딘가에 보내거나 올리는 것 같았다. 그 사이 조 감독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연습했던 원두가루 양과 물 온도, 물의 양을 맞춰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뽑아냈다. 계획하고 있는 도자기 컵이 준비되지 않아서 집에서 가져온 머그 컵을 사용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커피를 들고 나온 조 감독은 아주머니 앞에 잔을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멋진 컵을 준비하지 못했거든요.”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아주머니가 조 감독을 올려다 보면서 말했다.
“컵 좋은데요!”
그 때, 아주머니의 핸드폰에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응, 나야.”
“거기 어디야. 사진 보니까 가보고 싶다야.”
“나도 오늘 처음 왔어. 실내에 그림도 있고, 분위기가 조용하고, 사장님도 멋지셔.”
“나도 거기 가볼래. 내일 시간내서 같이 가자.”
“그럼, 친구들 모아봐~.”
“그래, 고맙다. 좋은 곳 발굴해줘서.”
“응, 내일 봐”
아주머니는 탁자 위의 왼쪽에 핸드폰을 내려놨다. 조 감독이 갖다 놓은 커피잔을 들면서 “어머, 커피는 뜨거울 때 마셔야 제맛인데....” 하고 말했다.
“전화 하시느라 좀 식었지요? 다시 뽑아 드릴게요.” 조 감독은 커피를 다시 뽑아 올 참이었다. 진심이었다. 고객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니에요. 뜨거운 커피는 내일 마실게요. 물 온도가 떨어질 때마다 커피 맛이 조금씩 변한다던데 그것도 괜찮아요.”
금발의 아주머니는 커피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 같았다. 조 감독은 커피 맛이 어떠냐고 물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막 배우는 단계라 물어볼 자신감이 없어졌다. 맛이 별로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차라리 안듣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발 아주머니는 커피잔을 완전히 비우고 일어섰다.
“사장님, 커피 맛이 좋습니다.”
“어이구~, 정말입니까?” 조 감독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저기, 내일 오후에 한차 올 거에요. 내일도 맛있는 커피 부탁드립니다.”
“아, 네에, 네에. 감사합니다.”
아주머니가 나가고 나자 가게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저 아주머니는 사교성과 네트워크가 아주 좋네. SNS도 잘 하시고. 그 새에 카톡으로 가게 사진을 올려서 홍보해주시다니. 그런데 내일 한차 온다는데 손님들이 한꺼번에 오면 걱정이야. 컵 준비도 안됐는데.... 집에 있는 것들 다 가져와야 겠어.
내가 내린 커피 맛은 진짜 맛이 있는 걸까.
여러 명 온다니까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야.
조 감독은 다시 커피 머신 앞에 섰다. 양팔을 펴서 앞뒤로 세 번 흔들었다. 정신을 집중하여 커피 내리는 연습을 재개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