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

새벽에 은행을 줍다니

투광등 2024. 11. 18.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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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은행을 주워러 밖으로 나갔다.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들이 "미쳤구나"하고 비아냥대도 어쩔 수 없었다. 원인은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일요일 낮 밥을 먹고 외출을 준비하면서, 딸에게 "요즘 은행이 길가에 많이 떨어져 있던데 주워가는 사람이 없다"면서 "내가 주워오면 먹을래?"하고 말을 꺼냈다. 딸은 곧장 "안 먹어"하고 대답했다.

나는 지나가는 말로 "옛날에는 길에서 줍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은행에 독이 들어있어 해롭다는 뉴스가 나온 뒤 은행 줍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다"면서 "날것은 먹으면 안 되고, 삶거나 구운 것도 성인 기준으로 하루에 2알 정도만 먹어야 된다고 하던데"라고 당시 뉴스를 본 기억을 상기시켰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는 "아예 주워올 생각도 없었으면서 주워오겠다고 했네"라고 나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딸이 "아빠가 주워와서 엄마한테 갖다 줘봐"라며 아내의 의심을 해소시켜 줄 것을 당부했다. 결국 나는 "그래. 봐서 은행 좀 주워 올게"하고 대답했다. 꼭 이날 주워오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저녁에 귀가할 때 은행을 주워오지 못했다. 다른 용무로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며칠 내로  주워오면 되겠지 하고 여유를 부렸다. 나를 본 아내는 "오늘 주워온다던 은행 어디 있어?"하고 물었다. '역시 내 말이 맞지! 당신은 은행을 주워올 생각이 없었던 거지' 하는 눈빛이었다.

차일피일 미루다간 실없는 남편이 되고 말 것 같았다. '그래, 집 앞에만 나가도 큰 은행나무가 몇 그루 있지 않은가. 내일로 미루지 말고 새벽에 나가서라도 은행을 주워오자'하고 아내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잠바를 다시 껴입고 은행나무 밑으로 갔다. 은행이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금방 50~60개 를 비닐봉지에 담았다. 한쪽 구석으로 이동해 모두 부어서 껍질을 깠다. 알만 챙겨서 집으로 들어왔다. 주방에서 퐁퐁을 풀어 깨끗이 씻은 후, 물기가 마르도록 종이 위에 올려놓았다. 아내의 태도에 신뢰를 주기 위해서라지만, 이런 건 좀 지나친 모습이 아닌가 싶다.

옛 어른들이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이럴 때 쓰는 말 같다.

(씻어서 종이 위에 올려놓은 은행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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