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이다.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아들녀석이 자꾸 졸랐다. 차를 운전하고 싶다고 말이다.
도로 주행중인데, 녀석은 막무가내였다. 어거지였다. 하도 조르기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내 승용차의 운전대를 맡겼다.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는데 이런 일에도 이 말이 어울리는 표현일까.
'그래, 이 녀석아.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한번 해봐!' 하고 속으로 뇌까렸다. 이미 운전대는 녀석의 손에 잡혀져 있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조롱섞인 핀잔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이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했다. 면허증을 딴 사실이 없는, 11살 먹은 녀석이 겁도 없이 차들이 오가는 도로에서 운전대를 잡았으니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서 앞쪽과 옆쪽을 번갈아 보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뿔싸, 앞에 가던 흰색 SUV 승합차가 갑자기 급정거를 했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면 추돌할 상황이었다. 조수석에 있는 나는 급히 왼발을 내밀어 브레이크에 갖다댔다. 내차가 섰다. 그런데 앞을 보니 내차는 이미 앞차의 범퍼를 들이받았고, 앞차의 범퍼는 엿가락처럼 럼 휘어져 안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결국 추돌사고가 터진 것이다. 후회가 몰려왔다. 어린 놈이 아무리 떼를 쓴다기로서니 위험한 차 운전을 맡길 일은 아니었다. 끝까지 차운전을 못하게 막았어야 했던 것이다.
사고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뒷차가 들이받는 사고가 났으면 앞차 운전자는 당연히 내려서 가해차량을 확인하고 신고하는 것이 마땅한데, 잠시 후 앞에 길이 뚫리자 그냥 출발해버렸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훌쩍 가버린 것이다.
피해차량이 먼저 떠나버렸으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 수 없었다.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피해를 입은 저 차는 왜 그냥 가버렸을까. 저 차에 말못할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그보다는 더 심각한 고민이 나를 짓눌렀다. 피해자는 사라지고 없는데, 가해자인 내가 경찰에 자동차 추돌사고를 신고해야 하는지, 나도 그냥 가버리는 것이 나은지 그게 고민이었다. 나도 이곳에서 아무 일 없듯이 벗어나버리면 뺑소니 차량으로 몰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까, 저럴까 하고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마음은 갈등의 도가니로 변했다.
한편으로 찰거머리 같은 아들의 아집에 밀려서 결국 사건을 자초한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 해서는 안 될 일과 할 수 없는 일은 절대로 승낙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어린 아들의 생각과 판단보다 나의 생각과 판단이 훨씬 종합적이고, 상식적임을 분명히 해서 여하한 상황에서도 내 판단과 입장을 후퇴시켜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아,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몸을 서서히 움직이면서 보니 내가 안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모두 꿈이었던 것이다. 꿈이었기에 망정이지, 꿈이 아니었다면 정말 언제까지 스트레스를 견뎌야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 꿈을 계기로 아들에게 한 가지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 아침, 점심, 저녁은 꼭 챙겨 먹으라고 말이다. 평소 식생활 습관을 강조하다가 최근 흐지부지 되고 있었는데, 이거라도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오늘 퇴근길에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집에 올 때 짜파게티 사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아침에 밥 안 먹고 학교 갔지? 밥 안 먹고 다니면 앞으로 아무 것도 안 사줄거야.” 그리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집에 들어왔더니 아들은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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