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딸이 막 출근하려는 나를 감동시켰다. 늘 감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딸의 대견스러움에 놀랐다. 초등학교 5학년 딸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자청했기 때문이다.
매일 조금 늦게 출근하는 아빠의 몫인 아침 설거지를 딸이 맡겠다고 한 것이다. 이날은 내가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설거지를 할 형편이 아니었다. 아내도 출근 시간이 빠듯해 설거지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오늘은 누가 설거지하지?" 하고 묻자 아내도 "나도 늦었는데…." 하고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 때 방학 중이라 쉬고 있던 딸이 "엄마! 내가 하면 안돼?"하고 물었다. 아내는 "정말이냐?"며 놀란 눈으로 딸을 쳐다보았다.
늘 어리다고만 생각해왔던 딸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하니 반신반의할 만했다. 나는 녀석이 장난치는 거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딸은 제 엄마의 도움을 받아 어른용 앞치마를 어설프게 두르고 큰 고무장갑을 끼고 개수대 앞에서 섰다. 정말 설거지를 할 모양이었다. 나는 믿기지 않아서 딸에게 다가가 어깨 너머로 바라보았다. 스폰지에 퐁퐁을 부어 손보다 서너배나 큰 그릇을 닦고 있었다. 큰 고무장갑을 끼고 그릇을 하나 하나 닦는 녀석을 보면서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보아온 녀석은 조금이라도 맘에 차지 않는 일이 생기면 토라지기 잘 하고, 눈물을 글썽대기 일쑤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어려보이기만 하던 그런 녀석이 엄마, 아빠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설거지를 할 생각을 하다니….
혹시라도 미덥지가 않아서 한 마디 던져보았다. "설거지 할만 해?"
딸이 말했다. "나 할 수 있어, 아빠!"
"그래, 내가 기분이다." 그러면서 호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천원짜리 지폐가 몇개 나왔다. 그 중에서 한 장을 딸 옆에 놔주며, "자, 오늘 아빠가 용돈준다."하고 말했다. 내가 딸에게 불쑥 돈을 주는 일은 거의 기적이다. 딸은 내가 준 천원을 보고 "아싸~."하고 신나해 했다.
출근하면서 생각해보았다.
딸이 많이 큰 걸까? 이제 5학년인데 내가 너무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건 아닐까. 그렇지, 방학 끝나면 6학년이네. 참, 세월이 빠르구나. 이런 걸 두고 부모들이 자식 키운 보람을 느끼는 걸까? 아무튼 흐뭇한 출근길이었다.
퇴근 후, 딸이 설거지를 잘 했는지, 느낌은 어떠했는지 궁금했다.
딸에게 살짝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아침에 설거지 해보니 할만해?"
"으응, 재미있었어." 딸의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딸은 내가 물어보는 것이 의아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되물었다. "아빠! 내일 또 설거지하면 천원 또 줄거야?" 나는 웃음이 나왔다.
"우리 딸, 그건 안되겠네."하고 조용히 대답해주었다. 녀석은 "에이~." 하고 '역시나' 하는 말투였다.
딸아, 아빠는 사실 당연히 해야 할 일에 돈으로 보상해줄 생각은 전혀 없단다. 그러나 너가 아빠를 감동시킨다면 아빠도 너를 감동시키기 위해 뭐든 기꺼이 해주고 싶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