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

배꼽때 떼주는 꿈

투광등 2023. 1. 20.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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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불안하고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어두컴컴한 어둠 속에서 황량한 건물 공사장 같은 곳을 지나갔다. 심리적으로 애써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불안했던 순간이 지나갔다.

다른 장면이다. 사람들이 사삼오오 모여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한 여성이 이리저리 오가며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 여성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에서 주변 사람들을 둘러봤다.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굴에 그림을 그려서 눈을 뜰 수 없다고 했다. 그 여성이 사람들의 얼굴에 그림을 그려준 것 같았다. 물감이 눈 위로 흘러내려서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었다. 얼굴에 물감이 묻은 사람이 얼핏 보였다. 붓 가는 대로 그린 그림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낙서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 여성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사람들의 얼굴에 그림을 그려준다면, 분명히 나에게도 그림을 그리려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 오면 그만이지만, 일단은 믿음을 갖기로 했다.

얼마 후, 그 여성이 마침내 내 앞에 나타났다. 국내에 꽤 알려진 유명 인사였다. 그녀는 나를 잘 모르겠지만, 내가 잘 아는 정치인들 중 한명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그녀도 반갑게 대해주었다. 대중을 만나는데 익숙해서인지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내 얼굴에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상한 반전이 벌어졌다. 어느새 내가 붓을 쥐고 있었다. 어디에 붓을 대야 할 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가 입고 있는 흰색 티가 보였다. 흰색 티는 어깨부터 앞가슴까지 알 수 없는 글자와 낙서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려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녀의 흰 티에 그림을 그려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붓을 들고 머뭇거리는 나에게 두 손으로 티의 앞 부분을 내밀었다. 가슴 아래쪽 배를 덮는 부분은 여백이 남아 있었다. 거기에다 그림을 그려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사람들이 낙서처럼 그린 그림 옆에 뭔가를 그린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여성은 계속 티의 아래쪽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붓을 갖다 댔다. 세로로 줄 긋듯이 선 하나를 그었다. 색깔은 선택한 적이 없는데 빨간색이었다. 여성은 그림을 제대로 그려달라는 눈치였다. 나는 아무런 영감이 없어서 더 이상 그릴 수가 없었다.

그러자 여성은 티를 가슴 쪽으로 걷어 올려 자신의 배를 보여주었다. 뽀얗게 드러낸 배를 쓰다듬으면서 보란 듯이 내밀었다. 아주 순간적인 일이었다. 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배 위에다 그림을 그려달라는 뜻이었다. 

일상 생활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명인사인 그녀가 나를 만날 일 자체가 없다. 더구나 그림을 놓고 무언의 대화를 나눌 일도 없다. 특히 거리낌 없이 배를 보여준다는 것은 꿈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설령 꿈이라 하더라도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10억 분의 1도 안될 것이다.

그녀는 한손은 위쪽으로, 한 손은 아래쪽으로 티를 벌려서 배를 완전히 드러냈다.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얹어서 약간 눌러보았다. 그녀는 제지하지 않고 가만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배 위에다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 자체가 생기지 않았다.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배꼽에 검은색 물체가 몇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배꼽때였다. 제법 커 보였다. 나는 여러 개 중에서 큰 것 하나를 잡아뗐다. 통째로 떨어지지 않고 부러졌다. 부러진 때를 그녀에게 보여주면서 배꼽때부터 떼야겠다고 일러주었다. 그녀는 티를 내려 배를 덮었다. 한쪽에서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들지 않았다. 부끄러운 듯했다.

눈을 떴다.
아, 꿈이었다. 왜 이런 꿈을 꿨을까?
꿈속에서 대부분의 상황은 가물가물하고 기억이 거의 안 나는데, 여성 유명인의 배꼽때를 뗀 상황은 너무 생생하게 남아서 의아해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오전에 부음 뉴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유명 원로 여배우가 오늘 새벽 외국에서 별세했다는 소식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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