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포 선생은 툭하면 나에게 "자네,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있지?"라며 웃으신다. 내가 장 선생의 '거창한'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거나, 반대되는 이야기를 자주 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말씀을 들으면 예의가 아닌 듯하여 '내가 뭘 잘못했나'하고 위축되기도 한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같이 웃으면서 "제가 감히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라고 부인하는 것으로 이 농담은 끝이 난다.
이런 일이 잦다보니 어떤 때는 '내가 정말 뭘 잘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결론은 '없다'였다. 내가 소신껏 살긴 하지만, 장 선생에게 오만하거나 방자한 언행을 한 적이 없다. 그럴 이유도 없다.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그러니 '내가 잘못한 것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다음에 또 장 선생이 '자네, 내 머리 꼭대기에 않아있지?'라고 묻는다면, 적극 대응하기로 했다. 단순히 아니라고 소극적으로 부인만 하지 말고 다른 공격적인 대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은 금세 나왔다. 장 선생의 주변 인물들을 죽 둘러보니 한분이 떠올랐다. 사모님이었다. 대체불가의 인물이다. 평생 고생하면서 뒷바라지해오신 사모님한테는 어떤 말도 못 하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 선생이 또 '자네,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있지?'라고 물으면 '그분은 사모님'이라고 대답해주기로 했다. 요즘 세상에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사는 '겁없는' 남편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장 선생을 골탕 먹일 거리가 생긴 것이다. 장 선생이 '머리 꼭대기' 이야기를 하면 '사모님'이라고 대답해줘야지 하고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며칠 후, 사무실에서 몇명이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 장 선생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이 사람이요,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어요."라며 웃었다. 나는 새로운 대답을 준비해두고 이때를 기다리고 있던 터라 벌써부터 웃음이 나왔다.
"선생님, 선생님 머리 꼭대기에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딱 한 분 있습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다른 분이 있다고 대답했다.
장 선생은 의외의 대답에 당황한 눈치였다. 눈이 동그래지면서, "자네가 아니고 누구야? 여기 안 실장이야?" 하고 사무실내 다른 사람을 지목했다. 안 실장은 사무실에서 궂은일을 다하는 살림꾼이다. 사실상 심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 실장은 아닙니다." 나는 부인했다.
"그럼, 누구야?" 장 선생은 내가 지목할 사람을 찾기 힘든 듯 바로 물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내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궁금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미리 준비해둔 답을 비로소 꺼냈다.
"사모님이시죠."
주변 사람들의 눈길이 장 선생에게로 모아졌다. 장 선생은 이 대답에 동의할까?
그동안 나를 향해 재미있다는 듯이 웃다가 궁금해하던 장 선생의 표정이 갑자기 썰렁해졌다. '사모님'이란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사모님에 대해 평소 미안해하고 있는 감정이 한번에 밀려온 듯했다. 그러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대답은 잊지 않다.
"그건 아니지, 이 사람아~." 마지 못해 대답하는 듯, 약간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평소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느닷없이 평생을 같이해온 아내가 떠오른데 대해 '당혹감'과 '미안함' 같은 감정이 섞인 듯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장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감정의 균형이 깨져 함께 있기가 불편해진 듯했다.
장대포 선생이 떠나자 평소 말이 거의 없는 안 실장이 한마디 했다. "장대포 선생님이 사모님 말씀 잘 들으셨으면 이렇게 하고 있겠어요?"
이 말은 장대포 선생이 사모님의 말을 거의 안 듣는다는 뜻이었다. 사모님이 하지 말라고 해도 장 선생은 자신의 고집대로 평생을 살아왔다는 의미였다. "그건 아니지, 이 사람아~."라는 대답의 속 뜻을 곱씹어보게 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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