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3월27일) 호박죽을 만들어 보았다.
밤 늦은 시각, 오래전에 내가 마트에서 사다 놓은 단호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두달은 지난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내버려두면 또 몇달이 갈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생각날 때 호박죽이나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상하지나 않았는지 칼로 잘라보았다. 의외로 신선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과일 칼로 여러 조각을 내서 껍질을 벗겼다.
냄비에 모두 넣고 적당히 물을 부은 후 끓이기 시작했다.
예전에 호박죽을 한번 만든 경험이 있었는데, 사실 실패작이었다.
가족들이 맛이 없다고 해서 나 혼자서 다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호박죽을 좋아하는 딸이 한 숟가락 멋어보고 맛없다면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쓴 웃음이 나왔다. 아마, 이번에도 내 혼자서 다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호박죽은 왜 달지 않았을까?
부페나 재래시장에 가서 호박죽을 사 먹으면 달달한 단맛이 나는데 내가 만든 호박죽은 왜 맛이 없고 밋밋했던 것일까. 그게 의문이었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검색을 해보기로 했다.
"호박죽 만드는 법"
블로그에 많은 글이 올라와 있었다. 그중 몇개 읽어보기로 했다.
호박외에 첨가물이 2가지 있었다. 설탕과 소금이었다.
호박죽에 설탕을 넣어야 단 맛이 나고, 소금을 넣어야 간이 되는 구나!
소금은 그렇다치더라도 설탕을 넣어야 호박죽이 달게 된다는 것을 이 나이에 알게 되다니 한심했다.
호박 자체로 충분히 단맛을 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래, 이번에는 설탕을 좀 넣어보자고 생각했다.
호박이 거의 끓을 무렵, 갑가지 몇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우선 찹쌀을 찾아 넣기로 했다. 한 컵을 씻어서 넣었다.
그리고 서리태를 좀 넣기로 했다. 반웅큼 정도 집어 넣었다.
냄비가 펄펄 끓기에 불을 약하게 줄였다.
두껑을 열어보니 단호박은 형체를 알 수 없게 풀어져 있었다.
찹쌀을 몇알 뜨서 먹어보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익을 것 같았다.
다음은 서리태였다. 에이고, 많이 덜 익은 상태였다.
이후 10분 단위로 참쌀과 서리태의 상태를 체크했다.
30분쯤 지나 나무주걱으로 저어보니 바닥이 눌었는지 뻑뻑했다.
약한 불에도 냄비 바닥이 눌을 수 있겠다 싶었다. 이후에 5~10분 단위로 저어야 했다.
1시간 이상 삶았는데도 약불이라서 그런지 서리태는 완전히 익지 않은 상태였다.
서리태가 익기를 기다리다 주방 한쪽에 고구마 몇개가 보였다.
그래, 저것도 넣어보자.
어릴 때 어머니가 고구마를 잘라 말린 빼때기를 넣어 만들어주신 죽맛이 아주 좋았던 추억이 떠 올랐던 것이다.
과일칼로 고구마 껍집을 벗기고, 얇게 썰어서 끓고 있는 냄비에 넣었다.
다시 10분쯤 흘러 죽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고구마는 그 새 익어 고유의 맛을 냈다.
서리태는 좀 더 익혀야 할 것 같았다.
물이 너무 졸아서 밥공기 2그릇 정도의 물을 붓고 약불에 10분쯤 더 끓였다.
마지막으로 설탕을 2~3 숟가락 정도 넣고 저어 주었다. 소금은 넣지 않았다.
시간을 정확히 재보진 않았지만 대략 1시간30분 넘게 걸렸을 것이다.
어느덧 자정을 넘겨 새벽.
야참으로 한 그룻 떠서 먹었다.
설탕을 많이 넣지 않아 달지 않았지만, 지난번보다 맛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아침을 죽 한 그룻으로 대신했다.
가족들은 내가 만든 음식은 맛이 없다며 안먹기 때문에 혼자 다 먹으려면 열심히 먹어야 한다.
그런데 이날 저녁,
귀가해서 냄비를 열어보니 호박죽이 많이 줄어 있었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먹은 것이다. 누굴까?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누가 죽 먹었냐고.
아내 말이 딸이 먹었다고 했다.
딸이 학교갔다 와서 배가 고파서 먹었던 것 같다는 것이다.
"호박죽인 줄 알고 먹었는데 고구마 맛이 났다"고 아내에게 '고구마 죽이냐?'고 물어봤다는 것이다.
아내는 "아빠가 호박죽 만든다고 했는데 고구마 맛이 왜 나냐?"고 대꾸했다고 했다.
"그래, 거기 고구마 좀 넣었지." 하고 내가 아내에게 말해주었다.
아내는 호박죽에 고구마를 넣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는지 황당한(?) 사실에 웃음보를 터뜨렸다.
딸이 고구마 죽이냐고 물어봤을 때 터무니없다고 일축했던, 엄마로서의 체면이 안섰던 것이다.
딸은 호박죽에 고구마 맛이 난 이유를 확인하게 되자 비로소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딸도 내가 만든 호박죽은 맛이 없다며 남은 것을 먹지 않았다.
결국 남은 죽은 내가 다 먹어야 했다.
아침, 저녁식사로 이틀 걸렸다.
다음에 또 호박죽을 만들면
서리태는 따로 일찍 삶아두었다가 죽이 거의 다 됐을 무렵 넣어야 하겠다.
그러면 호박의 노랑색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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