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험 지병이 있는 나는 몸 상태가 아주 안 좋아져서 119를 불러 국내 최고 수준의 A종합병원의 응급실로 실려 갔다. 내 병을 잘 아는 나는 의료진에게 응급조치가 늦어지면 위험해질 것이라며 신속한 조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의료진은 나를 급한 환자로 대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눌 정도로 정신이 있어 보이니까 응급환자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10분쯤 후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고, 호흡이 가빠왔다. 그제야 의사와 간호사들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각종 검사를 시작했다. 이러다가 응급실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이 위태로운 급박한 상황이었다.
검사 결과가 나왔다. 당장 뇌수술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며 뇌수술 처방전이 내려졌다. 수술 결과의 성공 여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수술로 지병이 더 악화되거나 사망하더라도 병원과 의료진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병원 측의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장시간의 수술이 어떻게 끝났는지 눈을 떠보니 다른 병실이었다. 중환자실이었다. 내 얼굴 위로는 산소호흡기가 씌어져 있었다. 숨쉬기도 힘든데 목구멍으로 들어간 산소호흡기의 호스가 너무 갑갑하고 불편했다. 나의 두 팔목과 두 발목은 병상에 묶여져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 이곳은 사람이 올데가 못되는, 생체실험실과 다름없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중환자실은 환자에게 숨 쉴 수 있는 자유조차 보장된 곳이 아니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지 둘째 날, 옆 침대에 있던 환자가 얼굴에 흰 가운이 덮여 밖으로 나갔다. 셋째 날도 환자 한 명이 침대에 그대로 실린 채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사망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입안에 들어있는 호스 탓에 어떤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이 상태로 어떤 일이 벌어진들 중환자실 밖에 있는 가족이나 친지들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외부와 소통이 완전히 끊겨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들어온 환자들이나 그들의 보호자들은 모두 각서를 써야 한다. 환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 말이다.
‘이곳에서 살아 나가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나갈 수 있을까?’
며칠 후, 중환자실에서 시끄러운 광경이 벌어졌다. 할머니 한분이 들어와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계셨다. 할머니는 왜 멀쩡한 자신을 병원 침대에 묶으려고 하느냐고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외형상 얼핏 보기엔 중환자실에 오실 분이 아니었다. 그 할머니는 곧 건장한 남자 인턴들과 몸싸움을 했다. 목소리는 컸지만 힘으로 어떻게 이기겠는가. 남자 인턴들은 발버둥치는 할머니를 손과 발로 강하게 제압하여 기어이 침상에 묶었다. 그리고 산소 호흡기를 얼굴에 붙이고 테이프로 봉해버렸다. 그로부터 할머니의 성난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중환자의 경우, 신체 여러 곳에 주사 바늘을 꽂고 산소 호흡기를 달아야 하므로 환자 보호 차원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병상에 손발을 묶는다고 했다. 의사나 간호사가 손발을 묶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데 그 할머니는 왜 안하려고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인턴 청년들에게 강제로 제압당하면서 몸을 더 상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나는 그나마 다행인 것이 정신을 되찾아 또렷해져 있었다. 단지 입에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어서 의사나 간호사에게 내 상태를 물어보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답답했다. 나 역시 하루하루가 고비였다. 매일 배에 물이 차올라 남산만 하게 배가 불러왔다. 복수를 빼지 않고 그 대로 놔두면 바로 저승길이 따로 없었다. 나를 담당한 인턴 여학생이 복수를 빼느라 애를 먹었다. 주사바늘을 이용하기에 한번 빼낼 때마다 7~8 시간씩 걸려야 했다.
하루는 이 여학생이 아침부터 복수를 빼내면서 점심때가 됐는데도 내 병상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인턴들이 한꺼번에 점심을 먹으러 나갈 모양이었다. 남학생 인턴 한명이 문 입구에서 내 담당 인턴에게 “밥 먹으러 같이 가자”고 말을 건넸다. 내 인턴은 “환자분이 복수가 많아서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라며 “먼저 다녀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른 인턴이 “부모님이나 친척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신경 써?”라며 내 인턴을 힐난하고 나갔다. 충격이었다. 그 인턴은 내가 정신이 멀쩡한 줄 모르고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그래, 중환자실에서는 부모 형제가 아니면 환자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은 곳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제일의 종합병원에서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이런 수준이라니 기가 찼다. 내가 꼭 살아 나가서 이런 중환자 병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려야 되겠다 싶었다. 중환자실은 절대 갈 곳이 못된다고 말이다. 또한, 가족이든 누구든 아는 사람이 근무하는 병원으로 가라고 꼭 추천하고 싶었다.
내 몸은 미세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복수도 점차 줄어들었고, 묶여있던 손도 움직일 수 있게 해주었다. 어느 날부턴가 인턴 여학생과 글로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인턴이 고맙게도 내가 손바닥에 써서 부탁했던 메모지와 필기구를 갖다 주었던 것이다. 필담으로나마 인턴 여학생과 소통할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러웠다.
하루는 인턴 여학생에게 물었다. 물론 필담이었다. “산소 호흡기를 떼고 싶다”고 메모지에 적어 보여주었다. 인턴은 “혈압이 낮아서 뗄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혈압 수치가 얼마가 나오면 뗄 수 있느냐고. 인턴은 90이상 나와야 된다고 대답했다. 내 혈압은 당시 90에 조금 못 미치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라면 보통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래 조금 더 기다렸다가 90으로 회복되면 산소 호흡기를 떼야지 하고 기다리지 않았을까. 그런데 나는 중환자실에서 산호 호흡기로 말문이 막혀 있는 것이 싫었다. 한편으로는 한시라도 빨리 불편하기 그지없는 산소 호흡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또 메모지에 글을 썼다. ‘산소 호흡기를 떼서 생기는 불상사에 대한 모든 책임을 내가 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떼어 달라’고 말이다. 내 의지가 아주 강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 인턴은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져온 서류에 모든 책임은 환자 본인이 진다는 서명을 해주고, 마침내 산소 호흡기를 뗄 수 있었다.
산소 호흡기를 떼고 숨을 스스로 쉬는 것, 내 생각 같지가 않았다. 숨 쉬는 일이 정말 어려울 줄이야! 숨 쉬는 것도 연습해야 한다고 인턴이 얘기해주었다. 길게 들이쉬고 내뱉기를 수 시간, 아니 반나절, 하루 이상 했을 것이다. 아주 조금씩 숨 쉬기가 나아졌다. 산소 호흡기를 뗀 것은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생명을 되찾는 시발점이었다. 자칫 위험한 결정이었고, 도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며칠 후 어눌하지만 말문도 틀 수 있게 되었다. 중환자실에서 내 의사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중환자실을 탈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중환자실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빈사상태로 지낸 지 20여 일만에 나는 일반 병동으로 옮겨진 것이다. 지옥문을 바라보던 중환자실에서 마침내 살아나온 것이다.
중환자실, 그곳의 환자들은 언제든 사망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환자들의 손, 발, 입이 모두 봉쇄당한 채 치료를 받게 되어 환자들의 의사는 의료진들에게 반영될 수 없었다. 전적으로 의료진들의 기계적인 치료 시스템에 생사가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의료진의 열정과 배려가 없다면 살 확률보다 죽게 될 확률이 훨씬 컸다. 병의 위중 여부를 떠나서 말이다. 중환자실에서 내가 느낀 점이 그랬다.
일반 병동으로 옮겨왔지만, 한동안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배가 고프다는 걸 거의 한달 만에 느꼈다. 미음을 먹을 때마다 토해내야 했다. 먹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걸음걸이도 다시 배워야 했다. 한 계단 오르는데 몇 분씩 걸리고, 세 계단을 오르는데 30분이 걸렸다. 난간에 기대서 섰다가 다리에 힘이 없어서 넘어지곤 했다. 기억력도 되살려야 했다. 눈에 익은 글자인데 뜻이 생각이 안 나고,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발음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갓 태어난 애기처럼 모든 것을 다시 시작했다.
지금은 일반병실에서도 퇴원하여 재활운동을 하며 일상생활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되돌아보면, 인턴 여학생이 나를 구해냈다. 생명의 은인이다.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지만 신경 써서 간호해주던 그 인턴의 앳된 얼굴이 생생하다. 퇴원한 지금도 그녀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 중환자실을 나오던 날, 그 인턴 학생이 신신당부했다. “선생님, 다음에 또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선생님과 같은 병명으로 다시 오신 분들은 모두 돌아가셨거든요. 제 시간에 맞춰 약 잘 드시고, 몸 관리 잘 하세요.” 내가 매일 제 시간에 약을 챙겨먹으며 살아 있는 이유는 바로 그녀의 마지막 경고이자 간절한 호소 덕분인 것이다.
그녀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Florence Nightingale)처럼 백의의 천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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