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

안중근 의사 순국 101주년

투광등 2011. 3. 1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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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1879.9.2~1910.3.26) 순국 101년을 맞아 일본인들이 안 의사의 비석을 세운다고 한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일본 후쿠오카와 사가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3월 25일 사가현의 한 사찰 입구에 '안중근 동양평화기원비'를 만들기로 했다는 것이다.

안 의사는 한국에서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지만, 일본에서 테러리스트로 격하되어 왔다. 따라서 일부 일본인들이 주도하고 있는 안중근 의사 비석은 안 의사에 대한 일본 내 평가가 달라지는 불씨가 될지 주목된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의 영접을 받던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고 러시아 관원들에게 체포됐다. 그날 저녁 일본으로 신병이 넘겨진 안 의사는 뤼순 감옥으로 이송돼 이듬해인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6일 오전 순국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앞서 1909년 2월 7일 연추하리(煙秋下里. 현재 러시아령 크라스키노)에서 김기룡,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김창두 등과 함께 '12인 단지동맹'을 결성했다. 안 의사를 포함한 12인은 이날 왼손 무명지를 자르고,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했다. 단지동맹으로 결성한 단체의 이름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이다. 단지로 결의를 더욱 굳힌 안 의사는 10개월 후 중국도 해내지 못한 거사를 결행한 셈이다.

 

그는 불꽃같은 짧은 생을 살면서도 교육자(돈의학교, 삼흥학교 경영)로서, 종교인(천주교 입교, 세례명 도마/Thomas)으로서, 서예가(뤼순 감옥 수감 중 남긴 육필, 그의 글을 해주체라고 한다)로서, 항잉독립운동가(대한의군 참모중장, 1908년 7월 의병운동사상 최초로 국외에서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 시도)로서, 사상가(동양평화론 주창, 미완의 '동양평화론' 집필)로서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서울 남산 중턱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기존의 기와 지붕의 기념관을 헐고, 현대식으로 새로 지은 것이다.

안 의사 순국 99주기 추념일인 2008년 3월 26일 기공식을 갖고, 의거 101주년인 2010년 10월  26일 개관했다.

국고 146억원과 국민성금 33억원 등 모두 179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부지면적 5772㎡(1750평), 연면적 3756㎡(1138평)에 지하 2층, 지상 2층규모이다. 단지동맹에 참여한 12인의 뜻을 기려 12개의 기둥으로 만들어졌다. 안 의사의 동상도 가로 4m, 세로 4m, 높이 7.2m로 새로 건립됐다.

기념관은 안 의사의 출생부터 순국까지 일대기를 보여주는 전시관과 관람객의 추모, 명상, 교육을 위한 명상의 길, 추모홀, 도서휴게실, 수장고, 기념품 판매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한편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집필한 '한국인 안응칠 소회'와 함께 작성한 이토 히로부미의 15개 죄상은 일본 외무성이 정서하여 보관 중이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명성황후 시해

2. 한국 황제 폐위

3. 5조약과 7조약 강제 체결

4. 무고한 한국인 학살

5. 정권 강제 찬탈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 강제 찬탈

7. 제일은행 지폐 강제 사용

8. 군대 해산

9. 교육 방해

10. 한국인의 외국유학 금지

11. 교과서 압수 및 소각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 유포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평화를 깨트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 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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