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캐릭터

뉘신지 모르으겠나..

투광등 2015. 7. 2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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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복권에 당첨됐다. 1등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따질 겨를이 없었다.

옆에 있던 한명이 하와이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일행 4명이 동시에 1등에 당첨된 것이다. 기적같은 일이었다.

사나이 4명은 즉석에서 하와이 여행 프로젝트에 의기투합했다.

 

평생 가볼까 말까한 하와이를 지금 안가면 언제 다녀올 것인가.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이지만,

1등 당첨 사실은 네명에게 희열을 만끽하게 하는 동류의식을 느끼게 했다. 

인생역전 기회를 갖게 된 나도 로또 1등은 큰 기쁨이었다.

하와이로 가서 실컷 놀다오기로 했다.

디스크 수술로 몸이 정상이 아닌데,

로또 1등은 수술 후유증을 자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신체의 모든 고통을 한숨에 날려버린 기적의 약이었다.

 

'뉘신지 모르겠으나 제가 절대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무명의 무덤 앞에서 지극 정성으로 기도했던 소망이 통했던 것일까.

뉘신지 모르는 고인이 돌봐주신 걸까.

 

로또 1등 당첨자 4명은 정말 하와이로 갔다.

야자수 아래로 푸른 파도와 포말이 넘실대는 넓게 펼쳐진 해변가.

울긋불긋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닷물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아, 그런데 로또 복권을 어떻게 하지? 

갑자기 큰 걱정거리가 생겼다.

너무 기뻐서 흥분한 나머지 복권 당첨권만 들고 하와이로 왔던 것이다.

가보 정도가 아니라 일생일대의 보물인 1등 당첨권을 잃어버린다면 모두 알거지가 될 판이었다.

표를 분실하거나, 물에 빠뜨려 사라진다면 영원히 귀국하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때 일행중 한명이 말했다.

"제일 믿음이 가는 사람에게 모두 맡기자."

그래서 한명을 뽑았다. 내가 봐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믿음이 가는 친구였다.

그 친구는 1등 당첨권 4장을 전체가 보는 앞에서 검정색 작은 상자에 넣고 열쇠를 채워 잘 보이지 않게 한쪽에 보관했다.

 

평생 처음 하와이로 여행와서 뜨거운 여름날 즐거운 피서를 즐길 수 있다니 너무 좋았다.

언제 회춘을 한 것인지 청년의 왕성한 기운으로 수영을 즐겼다.

근래 들어 세상 잡념을 잊고 즐겼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들어 오면서 맡겨둔 복권이 생각났다.

1등 당첨복권이 잘 보관되어 있을까. 한국까지 잘 가져가서 돈을 찾아야 텐데 말이다.

 

복권을 담아 상자에 보관했던 친구에게 이제 복권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오리발을 내밀었다. 언제 자신에게 복권을 맡겼냐고 되레 반발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언성이 오갔다. 그 친구는 복권을 내놓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 사이에 나머지 두명도 옷을 갈아입고 복권을 찾으러 왔다.

나는 두 사람에게 "이 친구가 지금 엉뚱한 소리를 하며 복권을 돌려주지 않고 있다"면서 서로 힘을 모아서 각자 복권을 챙길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복권을 보관했던 친구는 오히려 더 큰소리로 "이 사람이 우리 복권을 몰래 다 가져갔다"면서 나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몰아부쳤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던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자 말문이 막혔다.

 

어느새 복권 4장을 모두 훔쳐간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정확히는 3장이다. 한장은 내 것이니까.

 

그 친구는 핏대를 올리며 무대포였다.

잠시나마 믿었던 그 사람은 교언영색으로 두 사람을 설득하면서 나를 도둑으로 내몰았다. 1등 당첨금을 잃게되어 손실이 막대한데, 일행의 도둑으로 몰아 인격까지 손상시키다니 분통이 터지고 억울했다. 화가 하늘 끝까지 치고 올라가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더 비참하고 가혹했다.

두 사람마저 그 친구의 말만 듣고 나에게 복권을 내놓으라고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저 친구가 보관한 것을 당신들도 알지 않느냐." "저 친구가 거짓말 한 것이다."라고 항변해봤지만, 이미 돌아선 두 사람은 막무가내였다. 혐의를 뒤집어 씌운 그 친구는 나를 향해 온갖 욕을 해대며 두 사람을 더욱 부추겼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복권 당첨으로 들떴던 횡재의 기쁨은 한 순간에 지나갔다.

그 자리엔 복권 도둑으로 몰린 억울함과 분노로 채워졌다.

그것도 곧 닥쳐올 사태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마침내 칼을 빼내들고 나를 협박했다.

"훔쳐간 복권을 안내놓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점점 감정이 격해져 이성을 상실한 상태라 아무리 설명해도 나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이들은 마침내 칼을 휘두르고 누군가 내 배를 찔렀다. 피가 솟구치고, 얼굴과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됐다. 세명이 마구 찌르며 달려들어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였다.

주위에 경찰도 보이지 않고 의료진도 없었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복권 당첨금은 고사하고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 죽음을 맞게 됐다.

당첨 기분에 경거망동하여 어떤 사람들인줄도 모르고 함께 여행에 나선 것이 문제였다.

 

나는 세명이 휘두르는 칼날의 광기를 피할 길이 없었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나이인데 말이다.

어처구니 없이 이렇게 개죽음을 당해야 하다니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보이고, 아내와 아이들도 떠올랐다.

찰라의 순간이 지나자마자 선 채로 쓰러졌다.

 

하와이의 푸른 물결은 그 새 붉게 물들어 놀을 따라 출렁거렸다.

내 몸은 온통 붉은 색으로 채색되어 하늘과 바닷물에 붉은 그림자로 비쳐졌다.

그 그림자는 선홍빛 물결을 타고 수평선을 넘어갔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조심조심 눈을 지그시 떠보았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벽시계를 쳐다봤다

새벽 2시57분이었다.

 

'뉘신지 모르겠으나 제가 절대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 분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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