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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 이지덕 할머니의 '無情 50년'
최종편집; 2000년6월21일 이지덕 할머니. 올해 나이 84세. 사는 곳은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출생지는 평안북도 용천군 외화면 율곡리. 실향민이다.
이씨는 1.4후태때 33세의 젊은 나이로 4살 위인 남편 백기열씨를 따라 무작정 월남했다. 그것이 북에다 놓고 온 아들 정석, 관석과 딸 온석등 어린 3남매와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연년생인 그들이 아직 살아있다면 60세 전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3남매이지만 요즘 이씨에겐 그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한때는 그들이 너무 보고파서 애간장이 녹아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수십년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단다. 그러나 인고의 세월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3남매는 망각의 강을 건너갔다. 여든넷이라는 나이도 그렇지만 할머니를 짓누르는 주변환경이 너무 벅차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남한에서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름은 승석. 올해 나이 48세. 그러나 그 아들은 사춘기때인 30여년전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했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이 후유증에 시달리다 사망하자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북에 놓고 온 자식들과의 생이별에다 남편의 사별까지 겹쳐 목이 메였는데 그나마 서울서 겨우 얻은 아들마저 정신병을 얻었으니.... 할머니는 무너지는 억장을 다잡으면서 기나긴 세월을 억세게도 지탱해 왔다.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아들의 정신병을 고치기 위해 옥수수 펑튀기 장사도 하고 노점상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어느덧 팔순을 넘겨 버린 것이다.
아들은 대학시절 이범석 교수(작고)의 '오발탄'과 까뮈의 '이방인'을 유난히 좋아했다고 했다. 자신의 처지를 접목시켰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당시 왕십리 자택 근처의 '로망'이라는 다방을 즐겨 찾았고, 1호짜리 캔버스에 동화같은 유화를 그렸으며, 조그만 스케치북에 굵은 연필로 알듯말듯한 세상 풍경을 담기도 했다. 펑튀기 가게 앞마당에서 대학 후배와 함께 블랙커피 한잔과 담배 한갑을 놓고 정처없이 떠도는 구름을 보고 한 여인과의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속의 짝사랑일뿐이었다. 대학에서도 정신질환은 고쳐지지 않았다. 대학입학후 10년 가까이 뒷바라지를 했으나 졸업장을 못받고 끝내 중퇴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말했다. "내가 더 이상 학비를 대줄 여력이 없어 학교에 찾아가서 저 녀석 몰래 중퇴시켰다"고.
할머니는 고심끝에 아들을 용인의 어느 정신병동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웃의 눈총이 따가웠고 당신도 힘에 부쳐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했다. 그동안 정신병동도 9군데나 다녔다. 그런 세월이 20여년이 흘렀으나 아들은 나을 기미가 전혀 없다. 오히려 격리된 생활로 사회적응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같다고 이씨는 말했다. 그래도 이씨는 아들을 챙긴다. 설이나 추석때면 정신병동에 있던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온다. 남한에서 유일한 핏줄인 자식과 같이 명절을 쇠기 위해서였다.
덮수룩한 머리와 핏기없는 검은 얼굴, 구부정한 허리, 아들도 많이 늙었다. 지나간 세월이 지저리도 무정하다. 아들은 천식에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담배를 연신 피워댄다. 2백원짜리 솔담배다. "담배 좀 그만 피워"라고 애원해보지만 막무가내다. 커피를 타주면 한숨에 들이킨다. 추운 겨울에도 집에 오면 웬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 지. 이씨는 "추운 정신병동생활에 적응이 돼서 집안이 덥게 느껴지는 것같다"고 말했다. 어느 날 집에서 그린 그림을 보니 해골과 뼈만 앙상한 사람만 있지 않나 철모와 군내무반은 또 왜 그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다. 할머니는 TV에서 '금강산 관광이다'해서 난리를 피울때도 남의 세상 일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하루 살아가기도 힘든 처지에 꿈엔들 가 볼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요즘은 허리를 다쳐 당신 한 몸 추스리기도 힘들다고 했다. 가끔 찾아오던 교회 친구들도 아프다고 하니 발길이 끊어진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부에서 매달 주는 영세민 지원금 10여만원으로 지탱해가는 실향민 할머니의 처절한 삶. 아들 승석만 아니었더라면 할머니는 벌써 남편이 있는 안식처로 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노모 스스로는 아들만 빼놓고 이승을 하직할 모든 준비가 돼있단다. 당신이 죽으면 남편이 묻혀있는 금곡리 영락동산 묘지 옆에 묻히면 된다고 했다. 교회사람들이 그곳에 묻어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한 많은 이 세상, 떠나고 싶어도 이 아들 때문에 떠날 수가 없단다.
"젊었을 때에는 북에 두고 온 3자매 생각에 밤잠을 설치고 맘이 아린적이 하루에도 수십번이나 됐어요. 그러나 요즘은 잊고 삽니다. 여기 있는 저 아들 하나만 잘 되면 내일이라도 편안하게 갈 수 있을 텐데..."
할머니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어느 사이엔가 이지덕 할머니의 눈속에 질곡의 세월을 살아오며 묻혀져왔던 편린들이 잔설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평안북도 고향땅, 어린 3남매를 할머니의 손에 맡겨놓고 내몰라라 하고 떠나온 어머니로서의 죄책감, 그 3남매는 어떻게 됐는 지.... 서울에 있는 아들 탓에 북에 두고 온 3자매는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그래도 정녕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출처 : 사이버정치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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