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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최영미) 시

투광등 2020. 2. 12.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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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 물

                                   -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황해문화 97' 2017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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