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블로그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니 아들 녀석이 "아빠!" 하고 다가왔다.
평소 같으면 "아빠 왔는데 인사 안 해?" 하고 내가 야단을 쳐야 나를 바라보며 인사를 하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이날은 왠 일인지 내가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나에게 눈웃음을 치며 접근했다. 나는 속으로 '이 녀석, 오늘 뭔가 자랑할 일이 생겼군. 도대체 뭘 자랑하려고 그러지' 하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요즘 종이접기 놀이에 신이난 녀석이라, 아마도 종이 접은 작품을 보여주려나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종이 접기하느라 매일 색종이 소모량이 수십장이 넘는다. 2~3일에 한 번씩 색종이 사다주는 일이 일과가 될 정도이다. 매주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에 녀석이 만든 갖가지 작품(?)들이 2분의 1 박스 정도나 된다.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종이접기는 공룡이다. 처음 들어보는 공룡 이름을 대면서 자랑한 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이번엔 무슨 공룡을 만들었기에 이럴까. 당연히 이런 짐작이 앞섰다.
"아빠, 나 블로그에 오늘 방문객이 400명이 넘어."
녀석의 말은 의외였다. 초등학교 1학년이 블로그를 만들었다니, 그 자체로도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블로그 방문객이 400명이 넘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싶었다. 내가 만든 블로그(행군의 아침)는 하루 방문객이 고작 20명 정도인데, 이 녀석은 뭣 때문에 400명이나 방문한단 말인가. '참, 신기한 일이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너 정말 블로그 만들었어?" 나는 블로그 존재 자체부터 재확인해야 했다.
"으~응. 정말이야, 한번 볼래?" 녀석이 못미더워하는 나에게 확인을 시켜주겠단다.
"그래, 한 번 보자."
내가 컴이 있는 서재로 들어가자 녀석의 누나도 따라 들어왔다.
딸이 말했다. "아빠, 규민이 말이 정말이야." 하고 거들었다.
녀석의 블로그는 딸이 열어주었다. 네이버 블로그였다.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두 녀석은 마우스를 움직이며 "야, 또 덧글 붙었어."하고 클릭했다. 30개 가까운 덧글이 보였다. 심지어 "어디서 살 수 있느냐?"는 질문성 글도 있었다. 자세히 보니 곤충에 관한 이야기였다. 녀석은 곤충블로그를 만든 것이다. 평소 곤충에 관심이 많던 녀석이 어디서 따다가 곤충 사진을 올려놓은 것이다.
"저 곤충 사진은 어디서 구했나? 너가 직접 올린거야?" 하고 물었다.
"아니, 누나가 해줬어."하고 말했다. 딸이 동생 블로거를 만들어주고, 거기다 웹 서핑을 해서 곤충 이미지를 구해 올려놓았던 것이다. 이것이 하루 수백명이 방문하는 블로그가 된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또 블로그에 단 닉네임을 보고 실소가 나왔다. 자칭 '곤충박사'였던 것이다. 아이콘도 그럴 듯하게 안경을 쓴 얼굴을 사용하고 있었다. 프로필란에는 이름, 성별, 생일 등은 비공개로 해놓고, 별명으로 '곤충박사'외에 '성향' 항목에 '현명한 연구자'라고 기재해놓고 있었다. 저 프로필만 본다면 누가 초등학교 1학년의 블로그라 할까 싶었다. '이 녀석, 별 것도 다하네' 하고 녀석이 새롭게 보여졌다.
또 하나, 나를 웃긴 것은 '곤충박사'가 덧글 중 하나로 올린 글이었다.
"퍼 가실 땐 덧글 꼭 써주세요."라는 글귀였다. 이 녀석, 다른 사람의 것은 그냥 가져오면서, 자신이 올려놓은 것은 퍼갈 때 덧글을 꼭 써놓으라니 '비신사적인 행동'이 아닌가.
그래서 딸에게 물었다. "저 이미지 어디서 따왔나?"
딸이 말했다. "인터넷에서 찾아서 올린거야."
"저런 사진을 가져올 때는 어디서 찾아왔는지 출처를 꼭 밝혀야 돼. 알았지."
"응, 알았어. 그렇게 할께." 그러고선 딸도 자신의 블로그가 있다며 보여주었다.
딸은 닉네임이 '장미천사'였다. 여자 아이답게 화려하게 장식된 아이들 방 사진과 맛있는 요리 사진들로 채워져 있었다. 예쁘게 꾸며진 침실 사진에 "아~~이 침대에서 자면 잠이 잘 올텐데…. 꼭 한 번 자고 싶네요."라고 적혀 있었다. 아이들의 동심 세계에서 충분히 그럴만 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저런 침대 사달라고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걸 보면 세상 물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날 이후 나는 네이버에도 가입하고 블로그를 개설했다. 녀석들이 어떻게 블로그를 꾸려 나가는지 가끔 살펴보고, 녀석들의 블로그 세계에 동참하려고 맘 먹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