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가시던 날
이날 새벽, 가족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집에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아내는 당황한 목소리로 "할머니가 돌아가셨대요." 하고 말했다.
시골에서 칠순의 아버지께서 전화로 할머니의 임종 사실을 아내에게 알려준 것이다. 잠에서 덜깬 나는 아내의 말을 듣고 갑자기 정신이 멍해져왔다.
얼마 전 고향에 갔을 때 할머니는 겨우 나를 알아보셨지만 말씀도 잘 하셨다. 다만 거동을 거의 하지 못하셨는데 이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지난날 할머니와의 숱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 중에서도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할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이 뇌리를 스쳤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는 "중학교 가는 것은 보고 죽어야 할텐데….",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대학교 갈 때까지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결혼할 때까지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농담처럼 되뇌이곤 하셨다.
그런데 또래에 비해 늦게 결혼한 내가 아이를 낳고, 큰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을 다니고 있으니 할머니께서는 당신이 생각하셨던 시간보다 꽤 오래 사신 편이라고 해야할까.
큰 애가 학교 친구들에게 "우리 증조할머니 살아계신다."고 하자, 친구들이 "정말이냐?"며 믿지 않는 눈치더라해서 나와 아내가 웃은 적도 있었다.
웃으면 안되는데, 약간은 웃음도 나오고….
여하간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손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하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삼촌, 고모도 계시기 때문에 특별히 내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말봉 선생님에게 풍수지리를 배우고 있는 근우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에게 한 번 부탁해보자. 할머니에게 편히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드리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이태 전 말봉 선생님과 함께 시골을 방문한 적이 있는 친구는 내게 했던 말도 있고 해서 갑작스럽게 부탁해도 부담을 주지 않을 것 같 았았다. 이른 새벽이라 전화할 계제는 아니었다.
평일이어서 오전엔 사무실에 나가 업무 정리를 했다. 애들도 학교를 가야 하고, 내 혼자만 시골로 내려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시골에서 삼우제까지 치르고 올라와야 할 것 같아 급한 일만 우선 처리하기로 했다. 일을 대충 마친 후 근우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는 이날 말봉 선생님과 강원도에 가기로 일정이 잡혀있다며 말봉 선생님에게 여쭈어 본 후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과 아내를 데리고 남행길에 올랐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는 도중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회장님(친구는 말봉 선생님을 이렇게 부른다.)이 내려가신다고 하셨다. 내일(17일) 오후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겠다."
"그래, 고맙네. 내일 보자."
발인을 하루 앞둔 17일, 오후부터 문상객들이 몰려들었다. 3일상의 특성 상 손님이 한꺼번에 밀려든 것이다. 특히 저녁에는 멀리서 온 손님도 많아 식사와 술 심부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부산과 울산, 창원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초등학교 친구들이 찾아왔다. 성필, 성수, 형호, 희철, 영상이가 온 것이다. 읍내에 사는 향석이도 같이 와서 모두 반가웠다. 멀리서 찾아온 친구가 있어 반갑다는 옛얘기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운전할 친구들을 빼곤 술도 한잔씩 하며 오랜만에 세상 사는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이들은 다음날 출근해야 하므로 밤 10시 30분 경 떠났다. 나는 조심해서 가라며 마을 어귀까지 나와 환송했다.
5월 18일 장례식 날.
전날 오후 시골로 내려온 말봉 선생님과 친구는 우리 집에 잠자리가 부족해 동네 마을회관에서 겨우 눈을 붙인 후, 이른 아침 산소로 향했다. 사시에 하관하기 위해 묘자리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와 삼촌은 할머니를 17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합봉을 하기로 해 말봉 선생님과 친구는 할아버지 시신 수습작업도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물론 하루 전날 할아버지의 묘터와 합장할 묘터를 사전 답사한 상태였다.
집안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꽤 바빴다. 동네 어르신들이 상여를 메기 위해 우리집에 모였다.
오전 8시 10분경 안방에 모셔져 있던 할머니의 관을 상여로 운구했다.
장손인 내가 대문밖에서 발인축을 읽고 아버지와 어머니, 삼촌과 숙모님들이 곡을 했다.
늦게 온 조문객들이 잇달아 절을 올리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됐다.
9시경, 내가 할머니의 영정을 안고 상여를 인도하기 위해 맨 앞에 섰다.
이제 할머니를 영원히 보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복받쳐 오르는 눈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상여꾼들은 대문 앞에서 몇번을 밀고 당기고 하다가 마침내 산소를 향해 출발했다.
상여 뒤에 따라 오시는 아버지 대신 마산에 사시는 오촌께서 하관 시간을 맞추기 위해 상여꾼들에게 빨리 갈 것을 독촉했다. 그러나 상여꾼들은 동네 어귀와 중간 중간 멈춰서서 '노자돈'을 태울 것을 요구했다. 할머니의 저승 가시는 길에 노자돈을 풍족하게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위들(고모부님)에게 특히 많이 내도록 재촉했다. 장모 사랑은 사위 사랑이라고….
하관은 말봉 선생님의 감독 아래 예정 시간보다 조금 일찍 이뤄졌다. 이전 할아버지의 묘터보다 약간 윗쪽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새 보금자리를 잡은 것이다. 말봉 선생님과 친구는 할 일을 모두 마치자 곧바로 상경했다. 나는 성의 표시로 시골에서 재배한 표고버섯과 약간의 여비를 챙겨드렸다. 감사한 마음은 컸지만, 시골 형편상 성의가 적어 내심 미안했다.
오후 6시 경, 일꾼들이 묘소 마무리 작업을 거의 마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밤에는 비가 주룩주룩 쏟아졌다. 아버지와 삼촌들은 "일을 다 마치고 나서 비가 와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만 늦었어도 곧 모내기 철이어서 장례 치르기도 힘들뻔 했는데, 때를 맞춰 돌아가셨다는 말씀도 나누셨다. 다음날 19일에도 비는 계속 내렸다. 집안 사람들이 모두 쉬었다. 할머니께서 자식들에게 장례 준비하느라 고생했다고 하루 쉬게 한 걸까.
20일, 비가 그치고 날이 쾌청했다. 동네 사람들이 들에 나와 논에 물을 잡고 모내기 준비를 했다. 집에서는 상 중이라 특별한 일은 하지 않았다. 부고를 늦게 받아 찾아오는 조문객들을 맞았다. 그 중에는 선거에 출마한 후보도 있었다. 선거기간 중 후보자의 호별 방문은 금지돼 있는데, 빈소가 집에 마련돼 있을 경우는 어떨 지 모르겠다.
21일 새벽, 동트기 전에 탈상제를 지냈다.
장례식 후 산소에서 집으로 모셔온 할머니의 영정 앞에 모두 절을 올리고 곡을 했다. 삼우제가 끝났기 때문이다. 탈상제를 마치자마자 할머니의 영정과 집에 남아 있던 옷가지 등을 모두 꺼냈다. 우리가 입고 있던 상복도 모두 대문 앞 모퉁이에 모았다. 할머니를 영원히 보내는 의식이었다. 새벽 4시 이전에 모든 절차를 마쳐야 하기에 서둘렀다.
어둠 속에서 환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할머니의 마지막 남은 흔적들이 하나씩 둘씩 모습을 감추었다.
손자가 쓴 '행군의 아침'에서 송아지 새끼를 손수 끄집어 내셨던 할머니,
어떤 할머니보다도 당차게 세상을 사셨던 우리 할머니이시다.
할머니가 이제 영원히 하늘 나라로 가시는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좋은 곳에서 편히 잠드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