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

태안에서 자원봉사한 선배의 편지

투광등 2008. 1. 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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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평보씨,

 

어제(6일 ,일요일)

우리 둘째 아들하고 태안의 모항항에 가서 방파제에서 기름제거 작업을 하고 왔다네.


기름 냄새가 역하고 오랜만에 하는 육체노동이라 힘들기는 해도 역시 보람 있는 일인지라 마음만은 푸근했네.


아침 6시 반에 출발해 가는데 2시간 반, 도착하니 9시.

인터넷으로 모항항의 사정을 어느 정도 미리 파악하고 간 길이라 주민들한테 물어보고는 곧장 시커먼 기름에 오염된 방파제로 향해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네.

 

 

 

현지에서 얻은 면으로 된 수건이 최고 더만. 또 미리 가지고 간 흡착포도 유용하고.

닦고 닦고 또 닦았다네. 한 동안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근처에서 일하던 일군의 팀들이 라면 먹고 하자며 작업을 중단하더군. 우리는 시간을 몰라 계속 일을 했다네. 

 

얼마가 지났을까 옷 속에 있던 핸드폰의 자명종이 울리 길래 '아! 이제 11시 반이구나' 하고 생각했지. 그래도 우리는 계속 닦았다네. 힘이 있을 때까지 해야지 하고 말이네.

 

만조가 되더니 어느새 물이 점점 방파제 위로 차올라 오더만.

우리도 차츰 위로 올라와 작업을 계속했지만 어느새 나와 둘째 아들 진성이도 지치기 시작했네.


오후 1시반 이후에는 물이 차서 더이상 작업이 안 된다고 하더군.

어쨌든 우리는 오후 1시까지 작업을 하고는 자리를 떴네.

이런 일이 부산 앞바다에서 벌어졌다면 하고 생각하니 끔찍하기 짝이 없었네. 

 

 

눈에 보이는 바위 위의 기름을 씻어내기도 어려운데 손길이 닿을 수 없는 방파제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기름덩어리를 보니 '저걸 어쩌나' 하고 걱정만 되더군. 속수무책이라는 말 그대로였네.

 

밀려오는 바닷물이 기름을 위로 띄워 썰물 시에 그 기름이 다행히 방파제 바위 위에라도 앉으면 우리 같은 자원봉사자가 닦아내 줄텐데 하지만 모든 기름찌꺼기를 다 수거하려면 얼마만한 세월이 흘러야할까?


걱정만 태산이지. 

 

그래도 자원봉사자들의 의지를 통해 무언가 희망을 보았다네.   

참, 그들의 마음이 너무나 건전하고 적극적이었어. 우리 민족의 저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였다네.

 

 

 

내가 할 수 있는 힘은 너무나 작은데 많은 자원봉사자들의 힘이 모이니까 오늘 하루만큼은 그 넓게 보이던 방파제의 바위 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시커먼 기름덩어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장화와 마스크, 고무장갑 등 서울에서 가져온 작업용구들을 남겨두고 모항항 주민들이 끓여주는 컵라면과 커피, 밀감 등을 맛있게 얻어먹고는 다시 내차에다 몸을 실었네.

  

돌아오는 길에 모항항을 한번 죽 둘러보니까 그 피해가 엄청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네.

일요일인 데도 항구주변 횟집은 텅텅 비었고 고기잡이 어선 30여척도 모두 출어를 포기하고 항구에 정박해 있었네.

 

 

항구에는 어부는 간데없고 자원봉사자들의 차량만 가득했다네.  

 

두 시간 반을 달려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오니 그제사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이 쑤시기 시작하는데 몸살이 날 지경이더군.

 

집사람의 권유로 아스피린을 먹고 나니 통증이 조금 완화되면서 나도 모르게 골아 떨어졌다네. 이글을 쓰는 지금도 어깨가 조금은 뭉쳐서 아프다네.


메모만 보내려다가 이렇게 글이 길어졌네.


여의도에서 허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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